거창적십자병원, 또 축소인가…“예타 통과”에 매달릴 때가 아니다
300병상·18개 진료과에서 200병상 검토…거창·함양·합천 필수의료 공백 해소할 ‘실질적 의료역량’ 확보가 핵심
거창적십자병원 이전·신축사업을 둘러싼 논란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번에는 단순한 병원 신축 문제가 아니다. 거창·함양·합천으로 이어지는 경남 서북부권의 필수의료를 국가와 지방정부가 어느 수준까지 책임질 것인가라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다.
경상남도의회 문화복지위원회 공재권 의원은 28일 「거창적십자병원 조속건립 및 지역필수의료 특별회계 우선 반영 촉구건의안」을 대표발의했다. 문화복지위원회 위원 전원이 공동발의에 참여했다는 것이 경남도의회 측 설명이다.
건의안의 핵심은 명확하다. 예비타당성조사를 조속히 마무리하고, 사업 규모가 조정되더라도 지역책임의료기관으로서 필요한 필수의료 기능을 확보하며, 2027년부터 시행되는 지역필수의료 특별회계에 이전·신축 사업비를 반영하자는 것이다.
문제는 이제부터다.
91병상 병원으로 서북부권 의료공백을 감당할 수 있나
현재 거창적십자병원은 91병상·9개 진료과 규모다.
지역책임의료기관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규모와 시설만 놓고 보면 응급·중증질환을 포함한 광범위한 필수의료 수요를 지역 안에서 모두 감당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계속돼 왔다.
특히 거창·함양·합천을 하나의 생활권으로 놓고 보면 문제는 더욱 분명해진다.
지역에서 발생한 응급환자가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의료기관이 충분하지 않다면 결국 환자는 진주·대구 등 다른 지역의 의료기관을 찾아 이동해야 한다.
병원이 있다는 것과 필수의료가 완성돼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지역책임의료기관의 핵심은 건물의 존재가 아니라 응급환자를 받고, 중증환자를 치료하고, 필요한 진료과와 의료인력을 확보해 지역 안에서 의료가 일정 수준 완결되는 구조를 만드는 데 있다.
300병상에서 200병상으로…핵심은 숫자가 아니다
당초 거창적십자병원 이전·신축사업은 18개 진료과·300병상 규모의 종합병원을 목표로 추진됐다.
총사업비도 당초 2,304억 원 규모로 계획됐다.
그러나 현재 예비타당성조사 과정에서 200병상 규모로 조정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공재권 의원 측도 사업 규모 조정 가능성을 전제로 하면서도 필수의료 기능은 유지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기서 논쟁의 초점을 단순히 “300병상이냐, 200병상이냐”에 맞춰서는 안 된다.
정작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200병상으로 줄이더라도 당초 계획한 필수의료 기능을 실제로 수행할 수 있는가.
병상 100개를 줄이는 것이 단순한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면 더욱 그렇다.
병상 축소가 진료과 축소, 의료인력 축소, 응급·중증 기능 축소, 장비 축소로 이어진다면 결국 병원 신축의 당초 목적 자체가 약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200병상으로 시작하더라도 향후 확장을 전제로 건축·부지·장비·인력계획을 마련하고 핵심 필수의료 기능을 유지한다면 다른 접근이 가능하다.
따라서 정부와 지자체는 “200병상으로 줄인다”는 숫자만 제시할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유지하고 무엇을 줄이는지 구체적으로 공개해야 한다.
경상남도의회 문화복지위원회 공재권 의원은 28일 경남 서북부권의 필수의료 기반 확충을 위해 「거창적십자병원 조속건립 및 지역필수의료 특별회계 우선 반영 촉구건의안」을 대표발의했다.
거창권 의료 현실은 이미 경고등을 켰다
공 의원 측이 제시한 자료에 따르면 2024년 기준 거창권의 관내 입원의료 이용률은 33.9%로 경남 5개 중진료권 가운데 가장 낮았고, 치료가능사망률은 인구 10만 명당 51.9명으로 경남 평균 44.2명보다 높았다.
이 수치가 의미하는 바는 단순하다.
지역 주민들이 지역에서 필요한 입원진료를 충분히 이용하기 어려운 현실과 의료 접근성의 문제가 이미 존재한다는 것이다.
물론 특정 통계 하나만으로 거창적십자병원 이전사업의 모든 효과를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지역 의료공백을 해소해야 할 필요성이 존재한다는 문제 제기에는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정책의 질문도 달라져야 한다.
“이 병원을 얼마나 싸게 지을 것인가”가 아니라, “이 지역 주민들이 필요한 의료를 얼마나 지역 안에서 받을 수 있도록 만들 것인가”가 우선돼야 한다.
예타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공공의료 사업에서 경제성 검토가 필요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막대한 국민 세금이 투입되는 사업인 만큼 사업 규모와 비용, 수요, 운영 가능성 등에 대한 검증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예타 통과 자체가 사업의 최종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사업 규모를 계속 줄여 경제성 지표를 맞추는 방식이라면 오히려 신축 이후 지역의료 기능이 충분하지 않아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특히 병원은 일반적인 건축사업과 다르다.
건물만 지어 놓는다고 의료서비스가 제공되는 것이 아니다.
의사와 간호사, 필수진료과, 응급의료 인력, 중환자 치료체계, 의료장비, 운영비까지 함께 확보돼야 한다.
따라서 예타 과정에서부터 단순 병상 수가 아니라 ‘지역 필수의료 완결성’이라는 정책 목표가 얼마나 반영되는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2027년 지역필수의료 특별회계, 말 그대로 ‘기회’다
이번 논쟁에서 주목할 부분은 지역필수의료 특별회계다.
정부는 2027년부터 지역필수의료 특별회계를 신설할 계획이며, 2027년도 정부 예산안 기준 규모는 1조2,614억 원이다.
이 가운데 ‘지역주도 의료공백 해소 지원사업’에는 3,605억 원이 편성됐고, 정부는 지방정부가 지역 상황을 진단해 의료공백 해소사업을 설계·집행하는 방향을 제시했다.
또한 「필수의료 강화 지원 및 지역 간 의료격차 해소를 위한 특별법」은 지역 간 의료격차 해소와 지역완결적 필수의료 강화를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해당 법은 2027년 3월 11일부터 시행될 예정이다. 지역필수의료 특별회계는 2027년 1월 1일부터 시행될 예정이다.
이 대목에서 거창적십자병원 사업은 새로운 선택지를 검토할 수 있다.
기존 재정사업의 틀 안에서 예타 통과만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지역필수의료 정책과 특별회계의 취지에 맞춰 사업을 재설계하고 연계하는 방안이다.
다만 특별회계가 거창적십자병원 사업비를 자동으로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정부는 지역별 사업계획과 성과를 평가해 지원하는 구조를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경남도와 거창군이 실제 의료공백 자료와 필수의료 수요, 의료인력 확보계획, 병원 운영계획 등을 얼마나 구체적으로 제시하느냐가 중요하다.
300병상을 주장한다면 ‘왜 필요한가’부터 증명해야 한다
여기서 정치권과 지자체 역시 냉정해질 필요가 있다.
“300병상을 지어달라”는 주장만 반복해서는 설득력이 충분하지 않다.
300병상이 왜 필요한지, 어떤 진료과가 필요한지, 응급·중증환자를 얼마나 수용할 것인지, 의료인력은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 개원 이후 운영 적자는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까지 제시해야 한다.
반대로 정부 역시 경제성만을 이유로 규모를 줄이는 접근에서 벗어나야 한다.
200병상으로 줄였을 때 실제로 어떤 의료서비스가 사라지는지, 지역 주민의 의료이용에 어떤 변화가 발생하는지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도 함께 공개해야 한다.
결국 필요한 것은 정치적 구호가 아니라 공개된 숫자와 검증 가능한 의료계획이다.
‘200병상+향후 증축’이라면 조건부터 명확해야
현실적인 절충안으로 200병상부터 시작하는 방식을 검토한다면 더욱 구체적인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증축 가능한 구조를 처음부터 확보해야 한다.
병원 부지와 건축 구조를 향후 증축에 맞게 설계해야 한다.
둘째, 필수의료 기능을 먼저 확보해야 한다.
병상 숫자보다 응급·중증·심뇌혈관·모자의료 등 지역에서 반드시 필요한 기능을 우선 확보해야 한다.
셋째, 의료인력 확보계획이 함께 나와야 한다.
병상만 늘려놓고 의사와 간호사 등 필수인력이 없다면 실질적인 의료공백은 해소되지 않는다.
넷째, 300병상 확대 조건을 공개해야 한다.
“나중에 증축하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언제, 어떤 수요가 발생하면, 어떤 재원으로, 어떤 진료과를 추가할 것인지 구체적인 로드맵이 필요하다.
이제는 ‘조속 건립’만 외칠 때도 아니다
이번 경남도의회의 건의안은 거창적십자병원 사업을 다시 지역 필수의료 문제의 중심에 올려놓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다만 앞으로 중요한 것은 건의안 자체보다 실제 사업계획과 예산, 행정절차가 어떻게 움직이느냐다.
건의안은 향후 경남도의회 본회의 의결을 거쳐 대통령실·국무총리실·국회·보건복지부 등 관계기관에 전달될 예정이다.
따라서 이제 지역사회가 확인해야 할 것은 다섯 가지다.
① 왜 300병상에서 200병상으로 조정되는가.
② 200병상에서도 당초 계획한 필수의료 기능을 유지할 수 있는가.
③ 부족한 의료인력 확보방안은 마련돼 있는가.
④ 지역필수의료 특별회계와 실제로 어떻게 연계할 것인가.
⑤ 향후 300병상 확대가 필요할 경우 구체적인 재원과 일정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답하지 않은 채 “조속히 추진하겠다”는 말만 반복한다면 주민 입장에서는 또 하나의 행정적 약속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사설] 거창적십자병원, ‘작게 지어 예타 통과’가 답인가
거창적십자병원 문제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사업의 본질이 숫자 싸움으로 변질되는 것이다.
300병상이 무조건 옳다고 단정할 수도 없고, 200병상이 무조건 부족하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있다.
지역책임의료기관을 새로 짓는 이유가 현재의 의료공백을 해소하기 위해서라면, 신축 이후에도 필수의료 공백이 남는 규모로 사업을 축소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정부가 지역필수의료 특별회계를 만들고 지역완결적 의료체계를 정책 목표로 제시하고 있다면, 거창·함양·합천의 의료취약 현실 역시 그 정책의 실질적인 적용 대상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예타를 피하기 위한 축소 논리가 아니라, 지역 의료수요를 근거로 한 합리적인 사업 규모와 필수의료 기능을 입증하는 일이다.
그리고 정치권과 지방정부 역시 요구만 할 것이 아니라 주민들에게 사업비와 병상 수, 진료과, 의료인력, 운영비, 증축계획을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분명한 것은 거창적십자병원은 거창군의 건축사업이 아니라 거창·함양·합천 주민의 생명과 직결된 서북부 경남 의료안전망의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언제 착공하느냐”만 물어서는 안 된다. “완공된 병원이 과연 무엇을 치료할 수 있느냐”를 물어야 한다.
그것이 이번 논란에서 가장 먼저 답해야 할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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